현금을 받아 전달했다는 사실 자체는 유죄의 근거가 아닙니다
보이스피싱 사건에서 가장 억울한 자리에 서는 사람은 대개 현금수거책입니다. 조직의 상층부는 해외에 있고, 실제로 수사기관 앞에 서는 사람은 구인 광고를 보고 지원해 며칠 일하고 몇십만 원을 받은 20대 청년인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이때 수사기관과 법원이 판단해야 하는 것은 “현금을 받아 전달했는가”가 아니라 “그것이 범죄에 가담하는 일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 위험을 감수했는가”입니다. 앞의 사실은 거의 예외 없이 인정되지만, 뒤의 사실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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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필적 고의는 ‘알았을 가능성’이 아니라 ‘감수하겠다는 마음’입니다
미필적 고의의 고전적 정의는 대법원 2004. 2. 27. 선고 2003도7507 판결 등에서 확립되어 있습니다. 결과 발생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행위자에게 확실한 예견은 없지만 그 가능성은 인정하는 상태를 말하는데, 여기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요건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는 점입니다. 결과 발생의 가능성에 대한 인식이라는 지적 요소가 있어야 하고, 여기에 더해 결과 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라는 의지적 요소까지 갖추어져야 비로소 미필적 고의가 됩니다.
이 구분이 실질적인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인식 있는 과실’이라는 개념 때문입니다.
위험을 어렴풋이 인식하기는 했으나 설마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행위한 경우는 아무리 그 인식이 있었더라도 과실의 영역에 머무릅니다. 미필적 고의는 어디까지나 고의의 한 형태이므로, 위험을 진지하게 고려한 상태에서 그 위험을 감수하기로 한 경우에 한하여 인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이 판결의 핵심 논지입니다.
판결은 나아가 실무의 경향을 상당히 강한 어조로 비판했습니다. 피해자 보호나 일반예방의 필요성을 앞세워 고의 인정의 조건을 조금씩 완화하다 보면, 결국 결과가 발생했다는 사실만으로 처벌하는 결과불법 위주의 판단이 되고 무죄추정의 원칙이 형해화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피해가 크고 사회적 비난이 높은 범죄일수록 오히려 고의 판단은 더 엄격해져야 한다는 지적입니다.

대법원이 제시한 종합 판단 요소를 하나씩 짚어야 합니다
현금수거 사실은 인정하면서도 공모나 사기의 고의는 부인하고, 다른 조직원의 진술도 확보되지 않은 사건에서 법원이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대법원 2024. 12. 12. 선고 2024도10141 판결과 대법원 2026. 6. 24. 선고 2026도4003 판결이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두 판결은 공통적으로 여러 사정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합리적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하면서, 실질적으로 세 갈래의 검토 영역을 열거합니다.
첫째는 일을 맡게 된 경위와 관계의 성격입니다. 조직원과 어떤 내용으로 어떤 수단을 통해 연락했는지, 업무를 맡긴 사람을 직접 대면한 적이 있는지, 근로계약서나 업무위탁계약서가 정상적으로 작성되었는지, 그리고 그 채용의 과정이 통상적인 취업 절차와 얼마나 유사하거나 이질적이었는지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는 실제 업무 수행의 양태입니다. 현금수거 업무의 구체적 내용과 절차는 어떠했는지, 피해자를 만났을 때 어떤 행태와 언동을 보였는지, 수거를 위해 사용한 수단이 무엇이었는지, 특히 피해자에게 제시하거나 교부한 공문서·사문서가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경위로 만들어졌고 명의자가 누구인지가 중요하게 다루어집니다. 여기에 더해 수거 횟수와 수거액의 규모, 그리고 수거한 현금을 전달하거나 송금할 때 제3자의 성명과 주민등록번호 등 타인의 개인정보를 사용했는지 여부도 핵심적인 표지가 됩니다.
셋째는 대가와 행위자 자신의 사정입니다. 보수의 수준이 통상적인 업무의 대가로 납득할 만한 정도인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는 대가로만 설명되는 액수인지, 지급 방식이 정상적이었는지, 그리고 피고인의 나이와 지능, 사회 경력이 어떠한지를 함께 살펴야 합니다.
미필적 고의가 부정된 구체적 사정
법원은 위 요소들을 사안에 하나씩 대입한 끝에, 합리적 의심을 배제할 정도의 압도적으로 우월한 증명이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채용 과정에서 이른바 팀장이라는 사람은 정상적인 대출중개 업무라고 상세히 설명했고, 피고인은 이전에 유사한 고금리 대출을 받아 본 경험이 있어 그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이기 쉬운 상태에 있었습니다. 각종 서류 제출 요구나 다소 몰아붙이는 듯한 언동 역시 채용 절차의 일부로 이해할 여지가 컸다고 보았습니다.
수거 당시의 행동은 더욱 결정적이었습니다. 피고인은 피해자를 만나기 전 카페에 미리 도착해 자신의 신용카드로 음료를 결제했고, CCTV에 얼굴이 그대로 노출된 채로 있었으며, 돈을 받은 뒤에도 상당 시간 대화를 나누었고, 이동할 때마다 호출 기록이 남는 택시를 반복적으로 이용했습니다. 자신이 범죄에 가담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검거의 위험을 감수한 사람의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법원의 평가입니다.
물론 피고인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는 조직원에게 이 일로 잡혀가는 것은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을 했고, 회사 자금을 회수하는 일이라는 답변을 듣고 업무를 계속했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이러한 사정이 완전한 신뢰 상태를 뜻하지는 않더라도, 결과 발생을 용인하는 내심의 의사까지 인정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의심을 품고 물었고 답변을 듣고 안심했다는 것은 오히려 위험을 감수하기로 결단하지 않았다는 정황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피고인이 25세로 정규 교육과 사회 경험이 충분하지 않았고, 보이스피싱에 대한 인식 역시 금융기관을 사칭하거나 휴대전화 액정이 깨졌다며 돈을 요구하는 유형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되었습니다.
사후과잉확신편향, 지금의 눈으로 그때를 재단하지 않아야
후과잉확신편향에 대한 경고가 있습니다. 사건의 전모가 드러난 뒤에는 누구나 그때 알았어야 했다고 말하기 쉽습니다. 피고인 자신조차 수사 과정에서 돌이켜 보며 사실은 알았던 것 같다고 진술하게 되는 경우가 많고, 이러한 진술이 그대로 자백으로 취급되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법원은 피고인과 법관 모두가 이 편향에 빠질 위험이 크다는 점을 명시적으로 지적하면서, 판단의 기준 시점은 어디까지나 행위 당시라는 원칙을 재확인했습니다. 결과를 알고 난 뒤의 관점이 아니라, 그 시점에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정보와 인식 상태를 기준으로 엄격히 따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관적 구성요건의 입증은 검사의 몫입니다
고의나 공모와 같은 주관적 구성요건은 피고인이 자백하지 않는 한 직접증거로 입증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하여 입증의 정도가 낮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게 하는 증명력을 갖춘 증거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이러한 정도의 증명에 이르지 못한 경우에는 설령 피고인의 주장에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더라도 무죄로 판단해야 합니다. 대법원 2012. 6. 28. 선고 2012도231 판결, 2017. 5. 30. 선고 2017도1549 판결, 2022. 6. 16. 선고 2022도2236 판결이 일관되게 확인하고 있는 원칙입니다.
본인 명의 계좌로 돈을 옮겼다면 금융실명법 위반이 아닙니다
보이스피싱 사건에서는 사기 혐의와 함께 금융실명법 위반이 함께 기소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죄목은 조문을 그대로 읽는 것만으로도 성립 범위가 상당히 제한된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법률 제3조 제3항은 누구든지 불법재산의 은닉이나 자금세탁, 강제집행의 면탈 등을 목적으로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정하고 있고, 제6조 제1항이 이를 위반한 경우를 처벌하고 있습니다.
조문의 무게 중심은 목적이 아니라 행위 태양, 즉 타인의 실명으로 거래했는지 여부에 놓여 있습니다.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피고인 본인 명의의 은행 계좌로 입금되었고, 피고인이 그 돈을 조직원이 지정한 제3자 명의 계좌로 이체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법원은 피고인이 돈을 받은 계좌가 어디까지나 자기 명의 계좌이므로, 자기 계좌로 입금된 돈을 다른 계좌로 송금한 행위는 타인의 실명으로 금융거래를 한 것이 아니라 단지 본인 계좌를 이용해 자금을 이동시킨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구성요건 자체가 충족되지 않으므로 목적이나 인식을 따질 필요도 없다는 판단입니다.
법원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좌 제공에 의한 방조가 성립할 여지는 없는지도 검토했습니다.
피고인이 계좌를 조직원에게 넘겨 조직원이 그 계좌를 직접 사용하게 했다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증거상 피고인이 입금과 이체를 직접 관리했고, 통장이나 카드, 보안카드와 같은 접근매체를 조직원에게 교부한 사실도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방조로도 볼 수 없다고 결론지었습니다.
타인 명의 계좌, 이른바 대포통장을 이용한 경우와 본인 명의 계좌를 스스로 운용한 경우는 금융실명법상 평가가 완전히 다릅니다. 다만 본인 명의 계좌라도 통장이나 카드를 타인에게 넘겨준 사실이 있다면 전자금융거래법상 접근매체 양도·대여가 별도로 문제될 수 있으므로, 계좌를 어떻게 관리했는지에 관한 사실관계 정리가 방어의 출발점이 됩니다.
다만 반면, 성명불상자 등이 타인의 명의 계좌를 이용해 불법 목적의 금융거래를 하고, 피고인이 그 사실을 알면서 자신의 이름을 적요란에 기재하게 하거나 자금의 흐름을 연결해 주는 등의 행위를 한 경우에는 방조가 인정될 수 있습니다.
외국인 금융실명법, 금융실명법 방조 위반 등(.. : 네이버블로그
사기의 공범이라면 횡령죄는 별도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명불상의 조직원이 피해자에게 콘서트 티켓을 판매하겠다고 속여 2024년 3월 16일 새벽 피고인 명의 계좌로 22만 원을 송금하게 했고, 피고인이 이를 보관하다가 생활비 등으로 소비했다는 내용입니다.
대법원 2018. 7. 19. 선고 2017도17494 전원합의체 판결이 정면으로 적용됩니다. 이 판결의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무런 법률관계 없이 타인의 돈이 자신의 계좌로 송금되었다면 계좌 명의인은 송금인을 위해 그 돈을 보관하는 지위에 있게 되고, 이를 영득할 의사로 인출하면 횡령죄가 성립합니다. 보이스피싱 피해금이 입금된 경우에도 원칙적으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전원합의체는 중요한 예외를 명시했습니다. 계좌 명의인이 그 사기범행의 공범인 경우에는 피해자와 사이에 보관을 맡기는 위탁관계가 성립할 수 없고, 돈을 인출하는 행위는 자신이 가담한 사기범행을 완성하는 실행행위에 지나지 않아 새로운 법익을 침해하는 것이 아니므로, 사기죄 외에 별도의 횡령죄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심 법원은 피고인이 조직원에게 자신의 계좌번호를 알려주었고 조직원이 그 계좌를 이용해 여러 피해자로부터 돈을 입금받게 한 이상 피고인은 사기범행의 공범에 해당한다고 보았습니다. 공범인 이상 입금된 돈을 인출하고 사용한 행위는 사기범행의 실행행위에 흡수되므로, 피해자에 대한 별도의 횡령죄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형사소송법 제325조 전단에 따라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형법 제58조 제2항 단서에 따라 무죄판결 요지의 공시는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짚어 둘 것이 있습니다. 사기의 공범으로 평가되면 횡령죄가 빠지고, 반대로 공범성이나 고의가 부정되면 사기죄 자체가 무너지는 구조입니다. 다만 후자의 경우 피해자와의 위탁관계가 되살아나 횡령 성립의 여지가 남을 수 있으므로, 고의를 다투는 사건에서는 계좌에 들어온 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를 반드시 함께 설계해야 합니다. 사기 혐의를 방어하는 논리가 다른 죄목의 문을 열어 주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변호인의 몫입니다.
법률사무소 어스가 드리는 말씀
보이스피싱 현금수거 혐의로 조사를 받게 되면 대부분의 분들이 겪는 공통된 상황이 있습니다. 초기 경찰 조사에서 당황한 나머지 “돌이켜 보니 이상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는 취지의 진술을 하게 되고, 이 한 문장이 이후 재판에서 미필적 고의를 인정하는 결정적 근거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미필적 고의는 막연한 의심이나 사후의 후회로 성립하지 않습니다. 채용 경위, 계약서의 존부, 업무 수행 당시의 구체적 행동, 타인 명의 사용 여부, 보수의 수준, 그리고 본인의 나이와 경험까지 하나하나 검토되어야 하고, 그중 상당수는 초기 단계에서 증거로 확보해 두지 않으면 나중에는 되살리기 어렵습니다. 카드 결제 내역, 택시 호출 기록, 메신저 대화 전체 맥락처럼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자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유입니다.
또 하나 기억하실 것은, 보이스피싱 사건이 사기 하나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금융실명법 위반, 횡령, 전자금융거래법 위반, 범죄수익은닉규제법 위반이 함께 기소되는 일이 흔하고, 각 죄목마다 성립 요건과 방어의 논리가 전혀 다릅니다. 본인 명의 계좌였는지 타인 명의 계좌였는지, 접근매체를 넘겼는지 직접 관리했는지, 입금된 돈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에 따라 결론이 갈립니다. 죄목별로 나누어 다투지 않으면 하나를 지키려다 다른 하나를 잃게 됩니다.
법률사무소 어스는 홍대입구역 인근에서 보이스피싱과 금융사기 형사사건, 외국인 형사사건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왔습니다. 조사 일정이 잡히셨거나 이미 조사를 받으신 상태라면, 진술이 더 쌓이기 전에 상담을 받아 보시기를 권해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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